에디터로 활동하는 저는, 지난 9월 추석에 공주에 지냈던 시간과 이번 1월 설 연휴를 앞두고 있었던 군밤축제라던지, 공주에 있으면서 다양한 체험프로그램과 행사에 다녀오며 흥미로운 경험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매번 지역 행사와 축제가 있다는 것이 제게는 놀라우면서도 퍽 익숙하지 않습니다. 다른 도시에서 오신다던지, 가족단위의 방문객들이 많이 와계시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집에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하는 저로서는 즐거워하며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과 그런 풍경이 꽤나 생소하면서도 인상 깊었습니다.
다양한 체험 부스 중에서도 무형문화재 체험 코너를 운영하시며 '미래유산'과 각종 민속 문화 전승에 힘쓰고 계시는 '민속채록가' 이걸재 선생님을 만나 뵙고, 우리 민속문화에 대한 이야기와 지금까지 흘러오며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온 '우리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무형문화재는 연극과 음악 무용 놀이 등 실체로 보이지는 않지만 역사적, 예술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무형의 활동 혹은 기술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전승들 위해 어떤 활동들을 하고 계시는지 다다매거진을 통해 소개합니다.
오늘 인터뷰를 통해서 '예전'과 '요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예전과 달라진 요즘의 모습엔 어떤 부분들이 있을지 여쭙습니다.
(우선 드는 생각은) 우리나라 전체로도 그렇고 공주로도 그렇고 예전에 우림 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좋은 장점이나 모습들을 스스로 버린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현대 산업을 거치면서 많이 버렸다는 말인데, 그중 한 모습으로 함께 사는 삶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한 예로 들어서 옛날 마을에서 상당히 경계했던 것 중 하나로,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을 (지금 우리의 생각이나 인식보다도 더) 굉장히 심히 챙겼었어요.
마을에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기면 부자들에게 책임을 물었던 것처럼, 그런 인식이 강하면서도 (기본적으로 다들) 품고 있어서, 두레라는 공동체문화라던지 힘이 약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보이는 양태들이 우리 문화 곳곳에 남겨져있어요.
부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이상해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도 서원마다 출입을 못하게 하는 제한을 걸기도 하고, 그렇게 약한 자들을 챙기게끔 하는 모습들이 자연스러웠던 것이죠.
품꾼은 품꾼대로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당대의 고용주들, 부자들도 나름대로 마을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인데, 요즘은 산업화와 개인화로 인해 그런 마음들이 많이 흩어진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요.
그런 사람을 중시 여기는'마음'이 당시 집안과 동네에서 사람들의 인정, 존경과 더불어 가문들을 서열짓게하고 좋은 전통들이 남도록 끌고 갈 '힘'이기도 하고요.
또 한 가지 옛 말 중에 좋은 말로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있어요.
충 의 효 라고 부르는 세 가지 덕목을 챙기는 것을 중시 여겼어요. 임금과 아버지와 선생님은 똑같다는 의미인데, 조선왕조 600년의 기반이 되는 개념이기도 해요. 선생님의 가르침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그만큼 중히 여겨졌다는 거죠.
제가 요즘 여러 학교에 프로그램을 비롯해 강의와 체험학습등을 다니면서 보는데, 그런 '군사부일체'의 모습들이 많이 훼손되고 깨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걸 볼 때, 단순히 이런 생각들이 낡고 고리타분한 가르침이나 교훈으로 여겨질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가진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임에도 잃어간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 스스로가 돌아볼 때가 되었다는 생각도 함께 해요.
옛날에 당연하게 여겼던 (앞서 말했던) 개념들이 사상적이고 철학적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속의 놀이 문화에도 담겨있는데, 이 놀이 문화들을 함께 누리는 것으로 우리 민족이 품었던 그런 좋은 점을 이어나가고 맥을 짚어가는 것이 제가 민속을 이어나가는 이유예요.
지금 '윷놀이'를 가지고 14개 학교 840여 명의 학생들과 열 시간 분량의 윷놀이를 진행을 했어요. '윷놀이' 하나만 가지고도 그 시간을 채울 만큼 할 이야기가 많은데, 70종이나 넘는 윷 놀리는 방법이 있지만 그런 것들이 다 없어지고 기억에 남기로는 '말판윷'만 남게 되다시피되었는데, 그것들을 기록으로 다 남기고 규칙이나 노는 방법들을 다 남겼어요.
이를 활용해서 프로그램도 짜고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디지털 게임이나 소모적인 콘텐츠 이외에) 전통의 놀이 문화를 통해서, 즐기고 장난치는 우리의 문화를 통해서 지혜를 배우고 (좋은 문화와 정신을)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겠다고 봐요..
윷놀이를 통해서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게 뭔지 아세요?
"즐겁게 지는 법을 배운다"라는 거예요. 몇 번 이긴다고 해서 이기고자 하는 승부욕이 계속될 수는 없어요. 결국은 지게 되는데, 놀이 문화 자체가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과 친해기위해서, '관계하기 위해서' 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알려줌을 통해서 아이들이 배워요.
처음 지면 속상해서 울던 아이들도 지는 것이 억울한 것만은 아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어요. 컴퓨터니 핸드폰이니 정보화되고 가속화된 경쟁 사회에서의 혹독함에서 벗어나 '져도 즐거울 수 있다'라는 것들을 배워나가면서 민속 문화에 깃들어 있는 지혜와 삶의 배움을 습득하는 것이죠.
말씀해 주신 것처럼 수십여 종의 '윷놀이'를 조사하시고 기록하고 전승하신다고 하셨는데 처음 윷놀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윷은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마을마다 다른 윷놀이들이 이미 성행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일반 민속을 채록을 시작한 지는 95년도부터 조사를 했고, 당시에도 (이미 다른 분들보다도) 제가 윷놀이의 종류나 방법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어느 마을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말을 거시는데, (한참 다른 조사에 신경을 쓰는 와중에)
"이 선생, 윷은 놀릴 줄 알어?" 라며 물으시는 거예요. 집중하는데 말을 거시니까 퉁명스럽게 "민속하는 사람이 윷을 모를까"라며 받았는데, 그러고 나서 집에 들어와서 조사건을 정리하면서 생각해 보다가 그 어르신께서는 '윷을 놀린다'라고 표현을 사용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음에 찾아뵙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물어보기를 윷을 노는 거지 놀리는 게 무엇인고 물어보니 "윷 놀리는 거 많어" 라며 말씀하시더라고요.
윷을 바둑처럼 두는 '윷두기'라던지 윷을 던지고 노는 개념에서 벗어난 많은 '윷놀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첫 계기가 되었죠.
설명을 듣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어떻게 윷을 놀리는지 보여주겠다면서 보고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다른 (제가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면서 그렇게 윷에 빠지게 되었네요.
'윷두기' '놀리기'등 우리나라 말에 따른 세세한 표현마저 지역마다 차이가 있어서 그런 것들을 파고들기 시작했고, 보리풍년윷놀이, 공기놀이, 윷자치기 등 더 다양한 윷놀이 종류에 대해서 채록을 다닐 때마다 관심 있게 물어보고 십여 년간 57가지의 윷놀이를 찾게 된 거죠.
채록현장에서는 노인어른들의 말을 칼끝처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렇게 다시 질문하는 과정을 거치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그런 '윷 놀리기'에 대한 것들은 그대로 사라졌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죠. 윷놀이가 국가 주요 문화재가 되는지의 시점에서 그분들을 다시 찾았을 때는 이미 계시지 않았거든요.
'민속'이라는 단어와 분야 자체가 생소할 수도 있는데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민속이라 함은 양반이나 귀족의 문화가 아니라 서민들 사이에서 100년 이상 전해져 내려온 민간의 관습이라고 볼 수 있어요. 분명한 것은 대상이 서민이라는 것이고 이들이 즐기는 놀이가 무형문화재적 가치를 가지려면 100년 정도, 놀이 자체로 교육성을 띄고 대중적으로 보편적인 것이 중요해요.
민속문화가 있고 민속놀이가 따로 있어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역사로 남겨졌다고 할 때, 귀족 중심의 기록이 우선시될 수도 있는데 '민속'자체에 백성 일반민의 삶이 놀이와 문화자체에 담아있다는 것이죠. 서민들의 삶 속에 담긴 희로애락 자체가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민속채록가'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어요.
관련해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지 함께 소개해주세요.
첫째는 충청남도라던지 공주시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좋은 민속을 보전하는 길로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를 만들어가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겠어요.
무형문화재 만드는 일에는 어떤 동네가 그만한 자료도 있고, 좋은 놀이도 있고 한다고 하다면 그것들을 찾아다니는데, 실제로 지역 농민들은 자기 지역의 문화와 놀이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잘 몰라요.
농민들이 조금 실수를 하는 게 뭐냐면 같은 비슷한 종류의 것들 중에 자기네들 것 보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걸 갖다가 섞어 버려요. 농악을 예로 들어 우리 동네 건 촌스럽지 않냐면서 다른 가락을 얹는다던지 해서 다른 것들을 넣는 순간에 마을의 고유성이 죽어요. 그 고유성이 죽으면 문화재적 가치가 없어요.
채록을 다니면서 넓은 면적의 동네를 오랫동안 조사를 하면서 다니다 보면 지역 간의 차이를 기본적으로 느끼게 되고 그런 차이를 구분하는 눈을 가지게 되는데 여러 섞인 부분들을 분별해 내고 구분해서 무형문화로의 가치와 길을 찾아가도록 알리고 지도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 조사 과정에서 공주에서 윷놀이 채록을 주로 하기도 하고, 이제 공주 아리랑이 있어요.
공주 사람들이 많이 부르는데, 그 희한하게 청양도 안 부르고요 아산 쪽이나 이쪽으로도 부르지 않는데 공주만 부르는, 그런 공주 아리랑도 발굴을 해내고 내가 배우고 익혀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맥을 이어나가는 일. 지역에 향토성이 있는 것들의 맥을 짚어 이어나가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서면 쫓아다니면서 도와주고 기록해서 책이나 영상으로 남기는 일을 주로 하죠.
한 마을에 가서 그 마을 거를 다 살려줬다고 생각하고 나왔어요. 몇 년 후에 가보니 마을이 없어요. 그런 것들이 안타깝고...
요즘은 그런 기록을 남겨 놓으면 좋은 것이 (유튜브나 영상을 남기기가) 쉽잖아요. 지금 일시적으로 중단되어 끊겼다고 하더라도 그런 기록이 남으면 관심을 가지는 이가 다시금 이어갈 수 있으니까 채록과 조사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1년에 보통 20-30회의 채록 활동을 해요. 오랜 시간 활동을 하면서 민속학자니 소리꾼이니 불러주는 별명은 많은데 '민속채록가'로 소개되는 게 가장 좋아요.
채록활동을 하시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정직함이에요. 첫째는 허풍 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좀 안다고 해서 다른 것들을 더하고 빼는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되고,
둘째는 분야를 가리지 않아야 한다. 우리나라 민속 채록에 있어서 학자들이 실수를 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짚으라고 한다면,
가장 큰 하나를 꼽으라면, 부정적인 문화에 붙어 있는 문화와 민속을 걸러내 버렸다는 것인데, 옳지 못하다는 생각아래에 놀음이라던지 내기라던지 그런 행위들을 '놀음'으로 판단해서 조사 자체를 꺼리는 것이었죠.
저였다고 한다면 그런 경우에도 화투 노름이나 마작이라 하더라도 이런 것들까지 전체로 기록을 일단 해서 한 마을 전체로 광범위하게 조사를 해서 그중에 귀한 것을 잡아내면 그것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도록 했을 것 같아요.
정직하게, 그러면서도 편협한 조사를 하지 말고 넓게 보는 가운데에서 중요한 부분들을 가려내서 더욱이 깊이를 더하는 채록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주에서 오래도록 활동하셨으면 지금의 공주와는 또 다른 모습들을 많이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서울 가서 장사한다고 4년 정도 사는 거 외에는 지금까지 계속 공주에 있었죠.
공주를 생각하면 참 재미난 게 있어요. 다른 지역에 가서 어디서 왔느냐고 인사를 할 때에, 공 주서 왔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1980년대 90년대까지만 해도) "아 참 좋은 데서 오셨습니다" 이렇게 말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웃음) 근데 그건 간단해요. (아까 이야기한 대로) 서로 굶어 죽지 않아야 되고, 서로를 걱정하는 그런 모습들을 공주 사람들이 품고 있었다는 거죠. 양반과 평민들과 노비들이 서로를 걱정하며 살았어요. 공주 문화의 가장 큰 장점은 그것이죠.
조선조 말엽의 통계를 보면, 공주지역의 옛 기록들로 보면, 인구조사 호구 조사를 한 것 중에 인구 비율을 보면 양반 비율이 제일 높아요. 그럼 평민들이 살기 어려워야 되거든요? 수탈하는는 놈이 많다는 말이 되니까요. 그죠? 그런데 아닙니다. 여기는 양반들이, 그 동네에서 그 마을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있으면 누가 지탄을 받는다고 했죠? 부자 양반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양반들이 농민들을 걱정하는 쪽으로다가 굉장히 열심히 챙겨요.
재미난 얘기 하나 할게요. 실제 있었던 일이에요.
동네에 부잣집이 있어요. 추석이나 설 명절 때가 되면 그 집 댁 양반 할아버지가 앞에 자기네 동네 정면에 조상 산소에 올라가는지를 그렇게 서로들 물어봐요.
왜 물었는지 아세요? 저녁때가 됐을 때에 앞에 동네의 모든 집이 보이는 데를 올라가서 보면 연기가 올라가는 집이 있고 안 올라가는 집이 있는지 둘러본다는 거예요.
연기가 안 올라가는 집은 불을 안 때고 밥을 못 해 먹는 집이라는 거죠. 그러면 다른 날 자식을 굶기는 것도 가슴 아픈데 심지어 명절날 자식을 굶길 수도 있다는 것이니, 그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 집 사람을 조용히 불러다가 보리쌀이라도 한 말 주는 거예요 매년.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보리쌀 한 말 이렇게 얻어먹는 것도 매우 큰 거죠. 그러니 그거라도 얻어먹으려고 자기네들끼리 그렇게 양반댁 동태를 살피면서 영감님이 산에 오르는지 서로들 묻는다는 거죠.
이런 일도 있어요. 강변 마을에 부자가 셋이 있어요. 부자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거 아니에요?
제일 큰 부자가 있고 그다음 이렇게 세 집이 있는데, 금강변에 마을에 홍수가 나면 물이 들어와 벼가 다 삭게 되면 그 해는 무조건 흉년이죠. 지금의 제방은요 1970년대 이후에 저렇게 잘 막혔고 심지어 지금처럼 잘 막힌 건 1997년이 되어서야 된 것이니 그 전의 일로 부자집안끼리 말을 맞추는 것이죠. 물이 어디까지 넘어오냐를 정해서 자기들끼리 물이 요만큼 들어오면 제일 부잣집에서 얼마만큼 동네에다 내놓고...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도와주는 것보다 동네에 공개적으로 내놓는 것은 정말 큰 차이가 있어요. 신세를 진다고 하죠? 그런 신세를 면하게 하기 위해서 동네에 내놓고 만다는 거예요. 그 도움 받은 사람은 그 부자한테 매이잖아요. 동네로 내놓으면 동네에서 그걸 나눠 주는 거예요
근데 조금 더 넓게 물이 들어오면 두 집이, 조금 더 넓게 들어와서 진짜 막 가을이 아무것도 못할 정도 되면 세 집이 같이 내놓는 양을 정해놨다는 것이에요. 이런 모습들은 정말 지금 세상 사람들이 크게 배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많이 버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돌본다는 것이 어떤 복지보다도 기본으로 가져갔던 우리의 모습들이라는 것이죠. 돌보는 문화 자체가 전반에 고루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것들이 보이지 않게 혹은 보이더라도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또 도와서 좋은 쪽으로 견제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고장이 공주다, 그래서 '양반의 고장이다'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근데 이런 것들은 신기하게도 놀이문화 속에도 다 배어 있어요. 그래서 그 공주의 옛날 모습, 옛날 사람들. 마을 전체가 서로를 도우면서 어떻게 보면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화목하게 이끌어 나왔다는 거죠. 그게 좋은 거죠. 이런 걸 봐왔으니까, 지금 세상에도 마음이라도 그렇게 사는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다행스럽게도 공주는 옛 정이 많이 남아 있어요. 이제 좀 많이 아쉬운 부분이라 함은 평민 서민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 옛날 부자답지 못해 옛날 부자들은 여유가 있었고 마음에, 그리고 그것들을 베푸는 선의가 있어 그 선이 항상 정해져 있었는데 '내놓음'에 인색한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은 아쉽고요. 보통 사람들 삶 속에는 아직도 따뜻한 기운이 많이 남아 있어요.
공주뿐만 아니라, (민속을 전승 하시면서) 더 넓은 시야에서 이루고, 만들어가고자 하는 부분들이 있다면 어떤 부분들이 있을까요?
자기 고장 문화를 소중히 했으면 좋겠어요. 지금의 농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주에서 철원까지 안 하는 데가 없지만 옛날에 농악은 아래동네 윗동네 전부가 달랐어요.
민요도 마찬가지인데 전라도 민요, 경상도 민요, 충청도 민요, 경기도 민요, 강원도 민요가 전부 다른데, 그런데 그것들 텔레비전으로든 유튜브로든 요새는 보면 댓글이나 반응이 좋다 싶으면 자기 거 버리고 베껴먹으려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근데 그 과정에서 문제라고 한다면 앞서 말했듯 그 고장에 있던 고유성을 잃어버려요.
그래서 민속에 대해서는 거꾸로 해석을 해서 그 고장의 민속을 진짜 사랑하거든, 당신의 민속을 더 키워서 전국으로 퍼뜨리라고 말하고 싶어요. 민속은 결국 다른 지역에 먹히면 없어지는 것이거든요. 다른 것이 좋다고 따라가다간 다 없어져버려요.
일류 대학에서 우리나라의 가장 뛰어난 정수를 모아서 재편집하고 재창조한다고 해서 온 동네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마을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어떻게 그걸 따라가나 싶지만 그러나 우리네 것을 그냥 그대로 하면 되는 거죠.
그 지역의 것이 가장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라고 봐요.
제가 외국 공연을 4개 나라에 한 15번 16번 했던 것 같은데 저는 제 고집대로 했겠죠. 여기 것 아니면 안 했겠죠. 공주아리랑 노래 안 하고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신기한 건, 그럽게 고집스럽게 우리 동네 것을 밀어붙이는 것이 오히려 반응이 더 좋았다는 것이죠. 어떤 예술적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단순이 우리 동네 놀이를 즐기고 노는 것이 외국인이 볼 때도 그저 더 신기하다고 느낀다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이런 걸 보면 자기 고장의 꽃들로 가지고 움직이면 대한민국 대표가 될 수 있다는 말이죠. 시골 사람들은 놀았잖아요. 놀면 신기해해요. 우리 문화로 늘 하던 대로 실제 노는 모습들을 보여주면 관객들도 함께 놀아요.
그런데 '예술'로 접근해서 뭔가를 보여주려고 접근하면, 관객들은 그 가운데서 감동할 게 있나 없나 만 봐요.
우리 동네 것, 실제로 하던 대로가 아니면 실제로 그렇게 놀 수도 없고 관객들을 홀릴 수도 없고 진짜 박수를 받을 수도 없다고 봐요. 자기네 것이기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으로만 계속 공연을 성황리에 진행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지금 세상에서 TV에 홀리지 말아요. 잘하는 다른 사람들의 그 흉내 내지 말라고, 예술로서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어떤 것보다도 부족한 당신의 것을 즐겁게 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사람들은 즐겁게 봐주고 잘한다고 해준다. 그것이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
요새 명절의 모습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코로나도 있었고, 변해버린 명절의 모습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모습들이 어떤지,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좀 듣고 싶습니다.
우선은 민속을 이야기할 때 지금 같은 관점이 조금 위험해요. 민족은 살아 있는 것이라는 것이죠. 세상이 변하는 대로 변하는 것 또한 민속의 모습인 것이죠. 세상이 변하는 대로 변하는 거예요. 변하지 못하면 죽는 거예요. 변하기 때문에 옳다 그르다의 관점은 적당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런 모습들 속에서도 이야기할 수 있는 말할거리는 정말 많죠.
설 문화 하나만 가지고도 말할 거리는 많은데, 가장 이렇게 아쉬운 게 뭐냐면 세배 문화예요.
세배는 아버지 어머니한테만 하는 게 아니었어요.
옛날에는 세배는 누구네 집을 먼저 가고 누구네 집을 늦게 갈 건지도 다 리스트가 있었어요. 불문유로 다 있었죠.
그 동네에 양반 할아버지네가 제일 먼저 하고, 지금처럼 돈이 아니라 음식을 주셨는데 인색하지 않게 내어 주시는 것으로 덕인을 쌓고, 절만 받고 인색하게 내쫓는 집이면 그 댁에 빨리 갔겠냐는 거죠. 친구 할아버지, 친구 아버지가 그다음, 이런 식으로 친구의 아버지는 내 아버지와 같다는 식으로 찾아뵙고 그다음에 가는 데가 노인어르신, 동네에서 가장 연세 많은 사람들의 집안들 다니며 챙기기 시작해서 온 동네에 세배를 다니는 것이 문화였어요.
온 동네를 다녀도 몇 집 안 빠지는 진풍경이었지만 그런 문화를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죠.
그러면서도 마음에 가장 많이 남아 있던 것이 어떤 금전적인 이득이 아니라 마을의 어르신들이 내려주는 '일자 교훈'이었어요. 기억에 남기로 마을에 훈장 일을 하시던 양반집에 아주 연차 높으신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그분한테 세배를 가면 한 붓과 종이를 요만하게 이렇게 오려서 가지고 계시다가 붓글씨로 딱 한 글자를 써서 "너 이게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고, 네가 이것만 잘하면 돼, 꼭 그렇게 살아"라고 말씀하시면서 건네주던 그 종이가 일자교훈이에요.
(그때 써주신 한자가) 밝을 명. 넌 좀 우울하니 좀 명랑하게 살아라, 부지런할 근. "넌 좀 게을러. 열심히 해" 이렇게 한 글자를 주는 교훈인데 세뱃돈과 함께 주셨어요. 항상 책상에 붙어 있었는데 이런 모습들이 지금과는 다른 세배 문화였어요.
종교적인 논란을 차치하고 차례를 지내는 문화라던지 그런 모습들도 하나의 철학을 담고 있는데, 네가 세상에 있는 이유를 알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를 알아가는 굉장히 큰 철학들이 우리의 명절의 문화와 민속 문화에 담겨있어요. 할아버님의 산소 앞에서 이분들한테 너 부끄러운 손자 되면 아니 된다, 도둑질 같은 것 하고 다니면 안 된다 라던지 그게 무언의 관습으로 남아 집안에 이어져 가르쳐지는 것이고 가풍으로 이어지는 것들이거든요.
일제 강점을 거치면서 많이 변질되기도 했지만 좋은 관습들이 산업 사회를 거치면서 너무 급작스럽게 깨져버리게 된 것은 아쉽게 생각해요.
세배 한 번만 돌고 나면 친구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했던 말씀들이 대번에 생각이 나서 보이지 않게 잘못되는 것들을 예방하는 역할이 있었는데, 옛 표현으로 '어린아이는 마을이 키운다'라고 요즘은 억지로 프로그램이나 구호로 오히려 그런 걸 하려고 한다는 게 재미있지 않나요?
옛날에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했다는 점이.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인데, 그저 옛날이야기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옛날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이야기로 해석해서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런 일들을 채록가로서 이어가고 계신데, 설날을 기점으로 새해 인사를 다시금 한번 해주신다면 어떤 인사를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인사로 드릴 말씀으로 엉뚱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세종서부터 정조 때까지는 지구상 최고의 인권 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두 사람의 인물에 의해서 이게 확장이 되는데,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과 하륜에 의해서 우리나라의 조정을 꾸릴 당시에 할 때 어떤 제도를 만들어요. 사람의 목숨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사형 결정은 의정부에서 토론을 거쳐 왕의 승인을 받아야만 실행할 수 있었으며, 이는 귀족이나 일반 백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했어요.
조선은 노비제도를 운영하긴 했지만, 노예제와는 다른 형태로. 노비들은 일정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목숨에 대한 권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존중하도록 했던 거죠. 감찰사가 사형을 언도할 수 없었고 역모와 관련해서 '선참후계' 하는 상황이 아니면 아무나 죽이지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보호했던 나라가 우리나라예요.
우리나라 것이 소중하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이 있지만 단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조선조는 인권 국가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훌륭했던 나라예요.
한편, 일본은 조선과 대조적으로 "무사시", 칼잡이 관료에게 생사여탈의 권한이 있었는데, 이는 일본 사회에 깊이 뿌리 박힌 문화적 요소로, 오늘날까지도 그 여파가 남아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죠. 반면, 조선에서는 왕에게 직접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문화가 있었고 (드라마에 많이 나오듯 석고대죄하며 사람들이 상소하는 모습들을 보신다면) 이는 조선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지원하는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죠.
그렇게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 온 나라가 우리나라다.
비록 최근에 정치적 극단주의가 부각되고 있지만,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존중하고 지원하는 전통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서로를 더 걱정하고, 공동체를 중시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진 마음, 인.
상대방을 존중하는 예.
이런 것들 속에서 서로를 걱정하고 가꿔나가는 것에 힘을 쓰는 2024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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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로 활동하는 저는, 지난 9월 추석에 공주에 지냈던 시간과 이번 1월 설 연휴를 앞두고 있었던 군밤축제라던지, 공주에 있으면서 다양한 체험프로그램과 행사에 다녀오며 흥미로운 경험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매번 지역 행사와 축제가 있다는 것이 제게는 놀라우면서도 퍽 익숙하지 않습니다. 다른 도시에서 오신다던지, 가족단위의 방문객들이 많이 와계시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집에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하는 저로서는 즐거워하며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과 그런 풍경이 꽤나 생소하면서도 인상 깊었습니다.
다양한 체험 부스 중에서도 무형문화재 체험 코너를 운영하시며 '미래유산'과 각종 민속 문화 전승에 힘쓰고 계시는 '민속채록가' 이걸재 선생님을 만나 뵙고, 우리 민속문화에 대한 이야기와 지금까지 흘러오며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온 '우리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무형문화재는 연극과 음악 무용 놀이 등 실체로 보이지는 않지만 역사적, 예술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무형의 활동 혹은 기술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전승들 위해 어떤 활동들을 하고 계시는지 다다매거진을 통해 소개합니다.
오늘 인터뷰를 통해서 '예전'과 '요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예전과 달라진 요즘의 모습엔 어떤 부분들이 있을지 여쭙습니다.
(우선 드는 생각은) 우리나라 전체로도 그렇고 공주로도 그렇고 예전에 우림 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좋은 장점이나 모습들을 스스로 버린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현대 산업을 거치면서 많이 버렸다는 말인데, 그중 한 모습으로 함께 사는 삶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한 예로 들어서 옛날 마을에서 상당히 경계했던 것 중 하나로,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을 (지금 우리의 생각이나 인식보다도 더) 굉장히 심히 챙겼었어요.
마을에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기면 부자들에게 책임을 물었던 것처럼, 그런 인식이 강하면서도 (기본적으로 다들) 품고 있어서, 두레라는 공동체문화라던지 힘이 약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보이는 양태들이 우리 문화 곳곳에 남겨져있어요.
부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이상해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도 서원마다 출입을 못하게 하는 제한을 걸기도 하고, 그렇게 약한 자들을 챙기게끔 하는 모습들이 자연스러웠던 것이죠.
품꾼은 품꾼대로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당대의 고용주들, 부자들도 나름대로 마을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인데, 요즘은 산업화와 개인화로 인해 그런 마음들이 많이 흩어진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요.
그런 사람을 중시 여기는'마음'이 당시 집안과 동네에서 사람들의 인정, 존경과 더불어 가문들을 서열짓게하고 좋은 전통들이 남도록 끌고 갈 '힘'이기도 하고요.
또 한 가지 옛 말 중에 좋은 말로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있어요.
충 의 효 라고 부르는 세 가지 덕목을 챙기는 것을 중시 여겼어요. 임금과 아버지와 선생님은 똑같다는 의미인데, 조선왕조 600년의 기반이 되는 개념이기도 해요. 선생님의 가르침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그만큼 중히 여겨졌다는 거죠.
제가 요즘 여러 학교에 프로그램을 비롯해 강의와 체험학습등을 다니면서 보는데, 그런 '군사부일체'의 모습들이 많이 훼손되고 깨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걸 볼 때, 단순히 이런 생각들이 낡고 고리타분한 가르침이나 교훈으로 여겨질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가진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임에도 잃어간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 스스로가 돌아볼 때가 되었다는 생각도 함께 해요.
옛날에 당연하게 여겼던 (앞서 말했던) 개념들이 사상적이고 철학적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속의 놀이 문화에도 담겨있는데, 이 놀이 문화들을 함께 누리는 것으로 우리 민족이 품었던 그런 좋은 점을 이어나가고 맥을 짚어가는 것이 제가 민속을 이어나가는 이유예요.
지금 '윷놀이'를 가지고 14개 학교 840여 명의 학생들과 열 시간 분량의 윷놀이를 진행을 했어요. '윷놀이' 하나만 가지고도 그 시간을 채울 만큼 할 이야기가 많은데, 70종이나 넘는 윷 놀리는 방법이 있지만 그런 것들이 다 없어지고 기억에 남기로는 '말판윷'만 남게 되다시피되었는데, 그것들을 기록으로 다 남기고 규칙이나 노는 방법들을 다 남겼어요.
이를 활용해서 프로그램도 짜고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디지털 게임이나 소모적인 콘텐츠 이외에) 전통의 놀이 문화를 통해서, 즐기고 장난치는 우리의 문화를 통해서 지혜를 배우고 (좋은 문화와 정신을)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겠다고 봐요..
윷놀이를 통해서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게 뭔지 아세요?
"즐겁게 지는 법을 배운다"라는 거예요. 몇 번 이긴다고 해서 이기고자 하는 승부욕이 계속될 수는 없어요. 결국은 지게 되는데, 놀이 문화 자체가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과 친해기위해서, '관계하기 위해서' 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알려줌을 통해서 아이들이 배워요.
처음 지면 속상해서 울던 아이들도 지는 것이 억울한 것만은 아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어요. 컴퓨터니 핸드폰이니 정보화되고 가속화된 경쟁 사회에서의 혹독함에서 벗어나 '져도 즐거울 수 있다'라는 것들을 배워나가면서 민속 문화에 깃들어 있는 지혜와 삶의 배움을 습득하는 것이죠.
말씀해 주신 것처럼 수십여 종의 '윷놀이'를 조사하시고 기록하고 전승하신다고 하셨는데 처음 윷놀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윷은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마을마다 다른 윷놀이들이 이미 성행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일반 민속을 채록을 시작한 지는 95년도부터 조사를 했고, 당시에도 (이미 다른 분들보다도) 제가 윷놀이의 종류나 방법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어느 마을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말을 거시는데, (한참 다른 조사에 신경을 쓰는 와중에)
"이 선생, 윷은 놀릴 줄 알어?" 라며 물으시는 거예요. 집중하는데 말을 거시니까 퉁명스럽게 "민속하는 사람이 윷을 모를까"라며 받았는데, 그러고 나서 집에 들어와서 조사건을 정리하면서 생각해 보다가 그 어르신께서는 '윷을 놀린다'라고 표현을 사용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음에 찾아뵙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물어보기를 윷을 노는 거지 놀리는 게 무엇인고 물어보니 "윷 놀리는 거 많어" 라며 말씀하시더라고요.
윷을 바둑처럼 두는 '윷두기'라던지 윷을 던지고 노는 개념에서 벗어난 많은 '윷놀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첫 계기가 되었죠.
설명을 듣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어떻게 윷을 놀리는지 보여주겠다면서 보고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다른 (제가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면서 그렇게 윷에 빠지게 되었네요.
'윷두기' '놀리기'등 우리나라 말에 따른 세세한 표현마저 지역마다 차이가 있어서 그런 것들을 파고들기 시작했고, 보리풍년윷놀이, 공기놀이, 윷자치기 등 더 다양한 윷놀이 종류에 대해서 채록을 다닐 때마다 관심 있게 물어보고 십여 년간 57가지의 윷놀이를 찾게 된 거죠.
채록현장에서는 노인어른들의 말을 칼끝처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렇게 다시 질문하는 과정을 거치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그런 '윷 놀리기'에 대한 것들은 그대로 사라졌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죠. 윷놀이가 국가 주요 문화재가 되는지의 시점에서 그분들을 다시 찾았을 때는 이미 계시지 않았거든요.
'민속'이라는 단어와 분야 자체가 생소할 수도 있는데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민속이라 함은 양반이나 귀족의 문화가 아니라 서민들 사이에서 100년 이상 전해져 내려온 민간의 관습이라고 볼 수 있어요. 분명한 것은 대상이 서민이라는 것이고 이들이 즐기는 놀이가 무형문화재적 가치를 가지려면 100년 정도, 놀이 자체로 교육성을 띄고 대중적으로 보편적인 것이 중요해요.
민속문화가 있고 민속놀이가 따로 있어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역사로 남겨졌다고 할 때, 귀족 중심의 기록이 우선시될 수도 있는데 '민속'자체에 백성 일반민의 삶이 놀이와 문화자체에 담아있다는 것이죠. 서민들의 삶 속에 담긴 희로애락 자체가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민속채록가'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어요.
관련해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지 함께 소개해주세요.
첫째는 충청남도라던지 공주시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좋은 민속을 보전하는 길로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를 만들어가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겠어요.
무형문화재 만드는 일에는 어떤 동네가 그만한 자료도 있고, 좋은 놀이도 있고 한다고 하다면 그것들을 찾아다니는데, 실제로 지역 농민들은 자기 지역의 문화와 놀이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잘 몰라요.
농민들이 조금 실수를 하는 게 뭐냐면 같은 비슷한 종류의 것들 중에 자기네들 것 보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걸 갖다가 섞어 버려요. 농악을 예로 들어 우리 동네 건 촌스럽지 않냐면서 다른 가락을 얹는다던지 해서 다른 것들을 넣는 순간에 마을의 고유성이 죽어요. 그 고유성이 죽으면 문화재적 가치가 없어요.
채록을 다니면서 넓은 면적의 동네를 오랫동안 조사를 하면서 다니다 보면 지역 간의 차이를 기본적으로 느끼게 되고 그런 차이를 구분하는 눈을 가지게 되는데 여러 섞인 부분들을 분별해 내고 구분해서 무형문화로의 가치와 길을 찾아가도록 알리고 지도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 조사 과정에서 공주에서 윷놀이 채록을 주로 하기도 하고, 이제 공주 아리랑이 있어요.
공주 사람들이 많이 부르는데, 그 희한하게 청양도 안 부르고요 아산 쪽이나 이쪽으로도 부르지 않는데 공주만 부르는, 그런 공주 아리랑도 발굴을 해내고 내가 배우고 익혀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맥을 이어나가는 일. 지역에 향토성이 있는 것들의 맥을 짚어 이어나가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서면 쫓아다니면서 도와주고 기록해서 책이나 영상으로 남기는 일을 주로 하죠.
한 마을에 가서 그 마을 거를 다 살려줬다고 생각하고 나왔어요. 몇 년 후에 가보니 마을이 없어요. 그런 것들이 안타깝고...
요즘은 그런 기록을 남겨 놓으면 좋은 것이 (유튜브나 영상을 남기기가) 쉽잖아요. 지금 일시적으로 중단되어 끊겼다고 하더라도 그런 기록이 남으면 관심을 가지는 이가 다시금 이어갈 수 있으니까 채록과 조사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1년에 보통 20-30회의 채록 활동을 해요. 오랜 시간 활동을 하면서 민속학자니 소리꾼이니 불러주는 별명은 많은데 '민속채록가'로 소개되는 게 가장 좋아요.
채록활동을 하시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정직함이에요. 첫째는 허풍 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좀 안다고 해서 다른 것들을 더하고 빼는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되고,
둘째는 분야를 가리지 않아야 한다. 우리나라 민속 채록에 있어서 학자들이 실수를 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짚으라고 한다면,
가장 큰 하나를 꼽으라면, 부정적인 문화에 붙어 있는 문화와 민속을 걸러내 버렸다는 것인데, 옳지 못하다는 생각아래에 놀음이라던지 내기라던지 그런 행위들을 '놀음'으로 판단해서 조사 자체를 꺼리는 것이었죠.
저였다고 한다면 그런 경우에도 화투 노름이나 마작이라 하더라도 이런 것들까지 전체로 기록을 일단 해서 한 마을 전체로 광범위하게 조사를 해서 그중에 귀한 것을 잡아내면 그것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도록 했을 것 같아요.
정직하게, 그러면서도 편협한 조사를 하지 말고 넓게 보는 가운데에서 중요한 부분들을 가려내서 더욱이 깊이를 더하는 채록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주에서 오래도록 활동하셨으면 지금의 공주와는 또 다른 모습들을 많이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서울 가서 장사한다고 4년 정도 사는 거 외에는 지금까지 계속 공주에 있었죠.
공주를 생각하면 참 재미난 게 있어요. 다른 지역에 가서 어디서 왔느냐고 인사를 할 때에, 공 주서 왔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1980년대 90년대까지만 해도) "아 참 좋은 데서 오셨습니다" 이렇게 말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웃음) 근데 그건 간단해요. (아까 이야기한 대로) 서로 굶어 죽지 않아야 되고, 서로를 걱정하는 그런 모습들을 공주 사람들이 품고 있었다는 거죠. 양반과 평민들과 노비들이 서로를 걱정하며 살았어요. 공주 문화의 가장 큰 장점은 그것이죠.
조선조 말엽의 통계를 보면, 공주지역의 옛 기록들로 보면, 인구조사 호구 조사를 한 것 중에 인구 비율을 보면 양반 비율이 제일 높아요. 그럼 평민들이 살기 어려워야 되거든요? 수탈하는는 놈이 많다는 말이 되니까요. 그죠? 그런데 아닙니다. 여기는 양반들이, 그 동네에서 그 마을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있으면 누가 지탄을 받는다고 했죠? 부자 양반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양반들이 농민들을 걱정하는 쪽으로다가 굉장히 열심히 챙겨요.
재미난 얘기 하나 할게요. 실제 있었던 일이에요.
동네에 부잣집이 있어요. 추석이나 설 명절 때가 되면 그 집 댁 양반 할아버지가 앞에 자기네 동네 정면에 조상 산소에 올라가는지를 그렇게 서로들 물어봐요.
왜 물었는지 아세요? 저녁때가 됐을 때에 앞에 동네의 모든 집이 보이는 데를 올라가서 보면 연기가 올라가는 집이 있고 안 올라가는 집이 있는지 둘러본다는 거예요.
연기가 안 올라가는 집은 불을 안 때고 밥을 못 해 먹는 집이라는 거죠. 그러면 다른 날 자식을 굶기는 것도 가슴 아픈데 심지어 명절날 자식을 굶길 수도 있다는 것이니, 그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 집 사람을 조용히 불러다가 보리쌀이라도 한 말 주는 거예요 매년.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보리쌀 한 말 이렇게 얻어먹는 것도 매우 큰 거죠. 그러니 그거라도 얻어먹으려고 자기네들끼리 그렇게 양반댁 동태를 살피면서 영감님이 산에 오르는지 서로들 묻는다는 거죠.
이런 일도 있어요. 강변 마을에 부자가 셋이 있어요. 부자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거 아니에요?
제일 큰 부자가 있고 그다음 이렇게 세 집이 있는데, 금강변에 마을에 홍수가 나면 물이 들어와 벼가 다 삭게 되면 그 해는 무조건 흉년이죠. 지금의 제방은요 1970년대 이후에 저렇게 잘 막혔고 심지어 지금처럼 잘 막힌 건 1997년이 되어서야 된 것이니 그 전의 일로 부자집안끼리 말을 맞추는 것이죠. 물이 어디까지 넘어오냐를 정해서 자기들끼리 물이 요만큼 들어오면 제일 부잣집에서 얼마만큼 동네에다 내놓고...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도와주는 것보다 동네에 공개적으로 내놓는 것은 정말 큰 차이가 있어요. 신세를 진다고 하죠? 그런 신세를 면하게 하기 위해서 동네에 내놓고 만다는 거예요. 그 도움 받은 사람은 그 부자한테 매이잖아요. 동네로 내놓으면 동네에서 그걸 나눠 주는 거예요
근데 조금 더 넓게 물이 들어오면 두 집이, 조금 더 넓게 들어와서 진짜 막 가을이 아무것도 못할 정도 되면 세 집이 같이 내놓는 양을 정해놨다는 것이에요. 이런 모습들은 정말 지금 세상 사람들이 크게 배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많이 버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돌본다는 것이 어떤 복지보다도 기본으로 가져갔던 우리의 모습들이라는 것이죠. 돌보는 문화 자체가 전반에 고루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것들이 보이지 않게 혹은 보이더라도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또 도와서 좋은 쪽으로 견제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고장이 공주다, 그래서 '양반의 고장이다'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근데 이런 것들은 신기하게도 놀이문화 속에도 다 배어 있어요. 그래서 그 공주의 옛날 모습, 옛날 사람들. 마을 전체가 서로를 도우면서 어떻게 보면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화목하게 이끌어 나왔다는 거죠. 그게 좋은 거죠. 이런 걸 봐왔으니까, 지금 세상에도 마음이라도 그렇게 사는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다행스럽게도 공주는 옛 정이 많이 남아 있어요. 이제 좀 많이 아쉬운 부분이라 함은 평민 서민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 옛날 부자답지 못해 옛날 부자들은 여유가 있었고 마음에, 그리고 그것들을 베푸는 선의가 있어 그 선이 항상 정해져 있었는데 '내놓음'에 인색한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은 아쉽고요. 보통 사람들 삶 속에는 아직도 따뜻한 기운이 많이 남아 있어요.
공주뿐만 아니라, (민속을 전승 하시면서) 더 넓은 시야에서 이루고, 만들어가고자 하는 부분들이 있다면 어떤 부분들이 있을까요?
자기 고장 문화를 소중히 했으면 좋겠어요. 지금의 농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주에서 철원까지 안 하는 데가 없지만 옛날에 농악은 아래동네 윗동네 전부가 달랐어요.
민요도 마찬가지인데 전라도 민요, 경상도 민요, 충청도 민요, 경기도 민요, 강원도 민요가 전부 다른데, 그런데 그것들 텔레비전으로든 유튜브로든 요새는 보면 댓글이나 반응이 좋다 싶으면 자기 거 버리고 베껴먹으려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근데 그 과정에서 문제라고 한다면 앞서 말했듯 그 고장에 있던 고유성을 잃어버려요.
그래서 민속에 대해서는 거꾸로 해석을 해서 그 고장의 민속을 진짜 사랑하거든, 당신의 민속을 더 키워서 전국으로 퍼뜨리라고 말하고 싶어요. 민속은 결국 다른 지역에 먹히면 없어지는 것이거든요. 다른 것이 좋다고 따라가다간 다 없어져버려요.
일류 대학에서 우리나라의 가장 뛰어난 정수를 모아서 재편집하고 재창조한다고 해서 온 동네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마을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어떻게 그걸 따라가나 싶지만 그러나 우리네 것을 그냥 그대로 하면 되는 거죠.
그 지역의 것이 가장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라고 봐요.
제가 외국 공연을 4개 나라에 한 15번 16번 했던 것 같은데 저는 제 고집대로 했겠죠. 여기 것 아니면 안 했겠죠. 공주아리랑 노래 안 하고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신기한 건, 그럽게 고집스럽게 우리 동네 것을 밀어붙이는 것이 오히려 반응이 더 좋았다는 것이죠. 어떤 예술적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단순이 우리 동네 놀이를 즐기고 노는 것이 외국인이 볼 때도 그저 더 신기하다고 느낀다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이런 걸 보면 자기 고장의 꽃들로 가지고 움직이면 대한민국 대표가 될 수 있다는 말이죠. 시골 사람들은 놀았잖아요. 놀면 신기해해요. 우리 문화로 늘 하던 대로 실제 노는 모습들을 보여주면 관객들도 함께 놀아요.
그런데 '예술'로 접근해서 뭔가를 보여주려고 접근하면, 관객들은 그 가운데서 감동할 게 있나 없나 만 봐요.
우리 동네 것, 실제로 하던 대로가 아니면 실제로 그렇게 놀 수도 없고 관객들을 홀릴 수도 없고 진짜 박수를 받을 수도 없다고 봐요. 자기네 것이기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으로만 계속 공연을 성황리에 진행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지금 세상에서 TV에 홀리지 말아요. 잘하는 다른 사람들의 그 흉내 내지 말라고, 예술로서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어떤 것보다도 부족한 당신의 것을 즐겁게 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사람들은 즐겁게 봐주고 잘한다고 해준다. 그것이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
요새 명절의 모습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코로나도 있었고, 변해버린 명절의 모습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모습들이 어떤지,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좀 듣고 싶습니다.
우선은 민속을 이야기할 때 지금 같은 관점이 조금 위험해요. 민족은 살아 있는 것이라는 것이죠. 세상이 변하는 대로 변하는 것 또한 민속의 모습인 것이죠. 세상이 변하는 대로 변하는 거예요. 변하지 못하면 죽는 거예요. 변하기 때문에 옳다 그르다의 관점은 적당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런 모습들 속에서도 이야기할 수 있는 말할거리는 정말 많죠.
설 문화 하나만 가지고도 말할 거리는 많은데, 가장 이렇게 아쉬운 게 뭐냐면 세배 문화예요.
세배는 아버지 어머니한테만 하는 게 아니었어요.
옛날에는 세배는 누구네 집을 먼저 가고 누구네 집을 늦게 갈 건지도 다 리스트가 있었어요. 불문유로 다 있었죠.
그 동네에 양반 할아버지네가 제일 먼저 하고, 지금처럼 돈이 아니라 음식을 주셨는데 인색하지 않게 내어 주시는 것으로 덕인을 쌓고, 절만 받고 인색하게 내쫓는 집이면 그 댁에 빨리 갔겠냐는 거죠. 친구 할아버지, 친구 아버지가 그다음, 이런 식으로 친구의 아버지는 내 아버지와 같다는 식으로 찾아뵙고 그다음에 가는 데가 노인어르신, 동네에서 가장 연세 많은 사람들의 집안들 다니며 챙기기 시작해서 온 동네에 세배를 다니는 것이 문화였어요.
온 동네를 다녀도 몇 집 안 빠지는 진풍경이었지만 그런 문화를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죠.
그러면서도 마음에 가장 많이 남아 있던 것이 어떤 금전적인 이득이 아니라 마을의 어르신들이 내려주는 '일자 교훈'이었어요. 기억에 남기로 마을에 훈장 일을 하시던 양반집에 아주 연차 높으신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그분한테 세배를 가면 한 붓과 종이를 요만하게 이렇게 오려서 가지고 계시다가 붓글씨로 딱 한 글자를 써서 "너 이게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고, 네가 이것만 잘하면 돼, 꼭 그렇게 살아"라고 말씀하시면서 건네주던 그 종이가 일자교훈이에요.
(그때 써주신 한자가) 밝을 명. 넌 좀 우울하니 좀 명랑하게 살아라, 부지런할 근. "넌 좀 게을러. 열심히 해" 이렇게 한 글자를 주는 교훈인데 세뱃돈과 함께 주셨어요. 항상 책상에 붙어 있었는데 이런 모습들이 지금과는 다른 세배 문화였어요.
종교적인 논란을 차치하고 차례를 지내는 문화라던지 그런 모습들도 하나의 철학을 담고 있는데, 네가 세상에 있는 이유를 알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를 알아가는 굉장히 큰 철학들이 우리의 명절의 문화와 민속 문화에 담겨있어요. 할아버님의 산소 앞에서 이분들한테 너 부끄러운 손자 되면 아니 된다, 도둑질 같은 것 하고 다니면 안 된다 라던지 그게 무언의 관습으로 남아 집안에 이어져 가르쳐지는 것이고 가풍으로 이어지는 것들이거든요.
일제 강점을 거치면서 많이 변질되기도 했지만 좋은 관습들이 산업 사회를 거치면서 너무 급작스럽게 깨져버리게 된 것은 아쉽게 생각해요.
세배 한 번만 돌고 나면 친구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했던 말씀들이 대번에 생각이 나서 보이지 않게 잘못되는 것들을 예방하는 역할이 있었는데, 옛 표현으로 '어린아이는 마을이 키운다'라고 요즘은 억지로 프로그램이나 구호로 오히려 그런 걸 하려고 한다는 게 재미있지 않나요?
옛날에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했다는 점이.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인데, 그저 옛날이야기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옛날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이야기로 해석해서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런 일들을 채록가로서 이어가고 계신데, 설날을 기점으로 새해 인사를 다시금 한번 해주신다면 어떤 인사를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인사로 드릴 말씀으로 엉뚱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세종서부터 정조 때까지는 지구상 최고의 인권 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두 사람의 인물에 의해서 이게 확장이 되는데,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과 하륜에 의해서 우리나라의 조정을 꾸릴 당시에 할 때 어떤 제도를 만들어요. 사람의 목숨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사형 결정은 의정부에서 토론을 거쳐 왕의 승인을 받아야만 실행할 수 있었으며, 이는 귀족이나 일반 백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했어요.
조선은 노비제도를 운영하긴 했지만, 노예제와는 다른 형태로. 노비들은 일정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목숨에 대한 권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존중하도록 했던 거죠. 감찰사가 사형을 언도할 수 없었고 역모와 관련해서 '선참후계' 하는 상황이 아니면 아무나 죽이지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보호했던 나라가 우리나라예요.
우리나라 것이 소중하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이 있지만 단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조선조는 인권 국가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훌륭했던 나라예요.
한편, 일본은 조선과 대조적으로 "무사시", 칼잡이 관료에게 생사여탈의 권한이 있었는데, 이는 일본 사회에 깊이 뿌리 박힌 문화적 요소로, 오늘날까지도 그 여파가 남아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죠. 반면, 조선에서는 왕에게 직접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문화가 있었고 (드라마에 많이 나오듯 석고대죄하며 사람들이 상소하는 모습들을 보신다면) 이는 조선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지원하는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죠.
그렇게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 온 나라가 우리나라다.
비록 최근에 정치적 극단주의가 부각되고 있지만,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존중하고 지원하는 전통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서로를 더 걱정하고, 공동체를 중시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 속에서 서로를 걱정하고 가꿔나가는 것에 힘을 쓰는 2024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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